
얼굴 없는 패션 재벌: 권오일 회장이 200개 브랜드를 거느린 방법
"무신사가 키우고, 권오일이 가져간다."
패션업계에서 공공연히 떠도는 이 말은 한 사람의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키르시, 마뗑킴, 코닥, 말본골프, 비바스튜디오...요즘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브랜드들의 배후에는 한 명의 투자자가 있습니다.
바로 대명화학그룹 권오일 회장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브랜드를 거느린 이 사람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언론 인터뷰는커녕 직원들조차 엘리베이터에서 알아보지 못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의 손길이 닿은 곳은 패션업계 전방위에 퍼져 있습니다.
숫자로 보는 권오일 제국
먼저 규모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계열사: 30여 개
보유 브랜드: 200여 개
연간 매출: 약 2조 2,000억원 (2024년 연결 기준)
영업이익: 약 760억원
자산총액: 3조원 이상
대명화학 지분: 90% 이상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수치인지 비교해보겠습니다.
롯데 동탄점 개장 당시 대명화학은 단일 기업 기준 최다인 25개 브랜드를 입점시켰습니다.
백화점업계 관계자는 "대명화학의 협상 파워는 이미 대기업 수준"이라고 평가합니다.
은둔의 투자자, 권오일은 누구인가
권오일 회장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서울대 출신 회계사라는 것, 2000년대 중반 창업투자회사 케이아이지(현 대명화학)를 인수해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는 '베일 속 투자자', '얼굴 없는 재벌', '은둔의 경영자', 'M&A의 귀재' 등 다양한 별명으로 불립니다.
미디어 노출을 철저히 거부하고, 직원들도 그의 얼굴을 잘 모른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한 패션포스트 기사에 따르면, 집무실도 소박하고 통근도 자차로 직접 하며, 엘리베이터에서 직원들에게 밀침을 당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은둔형 스타일과 달리 그의 투자 행보는 매우 공격적입니다.
패션 제국의 시작: IT에서 패션으로
권오일 회장이 패션을 선택한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과거 IT 분야에 투자했다가 큰 손해를 본 경험 때문입니다.
시장 변화에 따라 어제의 신기술이 오늘 쓸모없어지는 IT와 달리, 패션은 '정직하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옷은 만들어 놓으면 계속 팔 수 있고, 어떻게 파느냐를 고민하면 된다."
이 철학을 바탕으로 그는 2009년 운명적인 만남을 갖습니다.
바로 코웰패션의 이순섭 회장입니다.
패션 사업 전문가인 이순섭 회장과 투자 베테랑인 권오일 회장의 합작.
이것이 대명화학 패션 제국의 시발점이었습니다.
공격적 M&A 전략: 2006년부터 현재까지
권오일 회장의 M&A 행보는 2006년부터 본격화되었습니다.
2006년: 필코전자 인수
2009년: 모다이노칩(당시 이노칩테크놀로지) 인수
2010년: 모다(당시 모다아울렛) 인수
2015년: 코웰패션 인수 (필코전자 흡수합병 방식으로 코스닥 상장)
2019년: 하이라이트브랜즈 지분 70% 인수
2020년: 하고하우스(하고엘앤에프) 계열사 편입
2021년: 로젠택배 인수 (3,400억원), 말본골프 라이선스 획득
2022년: 에어로케이항공 최대 주주 등극
2024년: 모스트(K뷰티 화장품 수출기업) 인수, 스파이더(스포츠 브랜드) 인수
이런 과정에서 권 회장은 한 가지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성장 가능성이 큰 작은 회사' 또는 '현재는 어렵지만 재편을 통해 반등할 수 있는 회사'를 선별하는 것입니다.
핵심 전략 1: 가치투자의 달인
권오일 회장은 '이삭줍기의 대가'로 불립니다.
기업회생절차를 밟고 있거나 어려움을 겪는 회사를 저렴하게 사들여 재건하는 방식입니다.
모다이노칩이 대표적입니다.
회생 절차에 있던 이 회사를 인수해 재편한 결과, 지금은 대명화학 매출의 31%를 차지하는 핵심 계열사가 되었습니다.
회계사 출신답게 그는 철저한 계산에 기반한 투자를 합니다.
지인들은 "절대로 손해를 보지 않는 타입"이라고 평가합니다.
핵심 전략 2: 무신사가 키운 브랜드를 인수하다
권오일 회장의 가장 영리한 전략은 무신사가 발굴한 잠재력 있는 브랜드를 포착해 인수하는 것입니다.
키르시(Kirsh): 체리 프린트로 유명한 1020세대 인기 브랜드
비바스튜디오(VIVA STUDIO): 스트리트 패션 대표 브랜드
피스워커(Piecemaker): 데님 전문 브랜드
86로드(86 ROAD): 캐주얼 브랜드
LMC: 라이풀을 전개하는 레이어 투자
오아이오아이(OiOi): 온라인 기반 패션 브랜드
업계에서는 "무신사가 브랜드를 발굴하고 키우면, 권오일 회장이 투자 제안을 들고 찾아간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돕니다.
실제로 무신사에서 매출 상위권을 차지하는 브랜드 상당수가 대명화학의 투자를 받았습니다.
핵심 전략 3: 디자이너 브랜드 집중 육성
권오일 회장은 최근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 투자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마뗑킴(Matin Kim): 국내외 젊은 층에게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는 브랜드입니다.
2021년 인수 당시 매출 50억원에 불과했는데, 2024년에는 1,200억원을 넘겼습니다.
영업이익률은 무려 30%에 달합니다.
마르떼 프랑소와 저버(Marthe Francois Girbaud): 계열사 레이어가 전개 중인 브랜드로, 마뗑킴과 함께 '3마'(마뗑킴·마르떼·마르디 메크르디) 브랜드 중 하나입니다.
분크(Vonk): 석정혜 디자이너의 핸드백 브랜드에도 일찌감치 지분 투자를 했습니다.
그 외에도 분더캄머, 히든포레스트마켓, 콤스튜디오, 로켓펀치, 어몽, 큐리티 등 2024년 한 해에만 7개 회사 17개 브랜드에 투자했습니다.
핵심 전략 4: 위임 경영
권오일 회장의 성공 비결 중 하나는 '간섭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기업을 인수한 후 직접 경영하지 않고, 기존 대표이사가 책임 경영을 하도록 합니다.
디자이너가 최대한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하며, 심지어 패션 계열사 간 컨트롤타워도 없습니다.
각 회사가 알아서 브랜드를 키우도록 전적으로 위임합니다.
"당장의 사업보다 그 사업을 하는 '경영자'가 중요하다."
권오일 회장은 소액을 투자한 뒤 조금씩 금액을 늘리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사람을 먼저 보고,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입니다.
핵심 전략 5: 패션 밸류체인 완성
권오일 회장의 궁극적 목표는 패션 산업의 전 과정을 장악하는 것입니다.
디자인: 200여 개 브랜드 보유
제조: 코웰패션 등 제조 기반
온라인 유통: 패션플러스, 하고하우스
오프라인 유통: 모다아울렛, 롯데백화점 부평점
물류: 로젠택배(국내 4위 택배사)
항공: 에어로케이항공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생태계로 연결됩니다.
브랜드에서 재고가 생기면 즉시 아울렛에서 처리하고, 온라인 주문이 들어오면 로젠택배가 배송합니다.
K패션을 해외로 수출할 때는 에어로케이항공이 운송합니다.
업계 관계자는 "쿠팡이 자체 물류망을 갖춘 뒤 한국 e커머스를 평정한 것처럼, 대명화학도 완결된 밸류체인을 통해 패션 시장 지배력을 키워가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대표 계열사 분석
코웰패션: 캐시카우
코웰패션은 대명화학의 핵심 수익원입니다. 2024년 매출 약 4,264억원, 영업이익 800억원을 기록했습니다.
주력 사업은 글로벌 브랜드 라이선스입니다.
캘빈클라인, 아디다스, 리복, 푸마 등의 속옷과 운동복을 홈쇼핑을 통해 판매합니다.
홈쇼핑 이너웨어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SK증권 서충우 연구원은 "코웰패션은 단순 제조가 아니라 기획부터 제조, 판매까지 노하우가 있는 특화된 회사"라고 평가했습니다.
하이라이트브랜즈: 브랜드 포트폴리오의 중심
2019년 지분 70%를 인수한 하이라이트브랜즈는 코닥어패럴, 말본골프를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코닥(KODAK): 빈티지 감성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말본골프(MALBON GOLF): 미국 골프 브랜드 국내 독점 라이선스
자회사로는 비바스튜디오, 하이라이트뷰티스, 망고리테일 등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하고하우스: 젊은 감성의 플랫폼
2020년 계열사로 편입된 하고하우스는 온라인 플랫폼 '하고'를 운영하며, 11개 기업 26개 브랜드를 인수했습니다.
가장 주목할 브랜드는 마뗑킴입니다.
인수 당시 매출 50억원에서 2024년 1,200억원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케이브랜즈: 온라인 강자
모다이노칩이 지분 79.9%를 보유한 케이브랜즈는 온라인과 홈쇼핑을 중심으로 연간 1,5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대표 브랜드: 닉스(NIX), 겟유즈드(Get Used), 흄(HUME), 머스트비(Must B), 바닐라비(Vanilla B), 범퍼(BUMPER), 케네스콜(Kenneth Cole), 카이아크만(Kai-aakmann)
모다아울렛: 오프라인 유통 거점
전국 여러 지역에 아울렛을 운영하며 재고 소진의 출구 역할을 합니다.
롯데백화점 부평점도 인수해 오프라인 입지를 강화했습니다.
로젠택배: 물류 혁명
2021년 3,400억원에 인수한 로젠택배는 국내 4위 택배사입니다.
이 인수로 대명화학은 '디자인→제조→판매→배송'까지 완결된 패션 생태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에어로케이항공: 글로벌 물류의 꿈
2022년 계열사 디에이피가 최대 주주로 올라선 에어로케이항공은 충북 청주국제공항을 거점으로 운영됩니다.
권오일 회장은 K패션이 K푸드, K뷰티처럼 대세가 될 것이라 믿고 있으며, 항공 물류가 그 핵심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2024-2025년: 다시 기지개를 켜다
2022년부터 2023년까지 내수 부진으로 M&A를 자제하던 권오일 회장이 2024년 하반기부터 다시 공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2024년 8월: 모스트(K뷰티 화장품 수출기업) 인수
2024년 9월: 스파이더(스포츠 브랜드) 인수
2025년 8월: 워크업(초저가 워크웨어숍), 오프뷰티(화장품 아울렛) 론칭
모스트는 코스알엑스, 조선미녀 등 30여 개 K뷰티 브랜드의 글로벌 수출을 지원하는 회사로, 대명화학의 뷰티 시장 진출을 예고합니다.
스파이더는 아웃도어 스포츠 브랜드로, 폰드그룹이 2026년 매출 1,000억원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워런 버핏?
업계에서는 권오일 회장을 '한국의 워런 버핏'으로 비유합니다.
유사점:
- 장기 가치투자 철학
- 좋은 경영진에 대한 신뢰와 위임
- 심플한 투자 방식 (자체 자금 또는 국책은행 대출)
- 미디어 노출 최소화
- 철저한 계산에 기반한 투자
실제로 권오일 회장의 투자 성공률은 매우 높습니다.
대명화학이 투자한 회사 상당수가 이익을 착실히 내며 알짜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LVMH를 꿈꾸다
권오일 회장의 비전은 명확합니다.
'K패션의 세계화', 그리고 '한국의 LVMH'입니다.
LVMH는 루이비통, 디올, 펜디, 셀린느, 지방시 등 70여 개 명품 브랜드를 거느린 프랑스 명품 그룹입니다.
권오일 회장은 대명화학을 통해 200여 개 K패션 브랜드를 육성하고, 이들을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시켜 한국판 LVMH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대기업의 관료적 문화에서는 디자이너의 브랜드 정체성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며 "권오일 회장의 위임 경영 방식이 신진 브랜드 육성에 더 적합하다"고 평가합니다.
우려와 리스크
하지만 모든 것이 순탄한 것은 아닙니다.
1. 풋옵션 소송 패소
2025년 12월, 권오일 회장은 모다이노칩 전 대표 측과의 주식매수청구권 소송에서 2심에서도 패소했습니다.
약 500억원을 지급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2016년 모다이노칩 인수 당시 체결한 풋옵션 계약에 따라, 전 대표 측이 주당 3만원에 주식을 매각할 수 있었는데, 권 회장이 이를 이행하지 않아 소송이 발생했습니다.
2. 빠른 확장의 부담
30여 개 계열사, 200여 개 브랜드를 관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각 브랜드가 독립적으로 운영되다 보니 시너지가 제한적일 수 있고, 통합 관리의 어려움도 있습니다.
3. 패션 트렌드 변화
패션은 빠르게 변하는 산업입니다.
지금 인기 있는 브랜드가 2~3년 후에도 같은 인기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4. 대형 경쟁자들의 등장
무신사, 지그재그 같은 플랫폼 기업들도 브랜드 인큐베이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습니다.
또한 전통 대기업들도 신진 브랜드 투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권오일 방식의 본질
권오일 회장의 성공 공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단계: 무신사 등 플랫폼에서 잠재력 있는 브랜드 발굴
2단계: 저평가된 시점에 지분 투자 또는 인수
3단계: 경영 독립성 보장하며 성장 지원
4단계: 계열사 간 시너지 (유통망, 물류, 자금 지원)
5단계: 글로벌 진출 지원
6단계: 성숙 단계 브랜드는 IPO 또는 매각으로 회수
이 과정에서 핵심은 '사람'입니다.
권오일 회장은 브랜드가 아니라 경영자를 봅니다.
열정과 진정성을 가진 경영자에게 투자하고, 그들이 자율적으로 브랜드를 키울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입니다.
미래 전망
2026년 초 현재, 권오일 회장의 야망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뷰티 시장 진출: 모스트 인수로 K뷰티 수출 기반 확보
초저가 시장 공략: 워크업, 오프뷰티로 가성비 시장 진출
글로벌 확장: 에어로케이항공을 통한 물류 경쟁력 강화
신진 브랜드 발굴: 지속적인 디자이너 브랜드 투자
업계에서는 권오일 회장이 앞으로 여성 브랜드, 식음료, 라이프스타일 영역으로도 확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결론: 조용하지만 강력한 영향력
권오일 회장은 한국 패션업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이지만, 동시에 가장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의 성공은 화려한 마케팅이나 브랜드 파워가 아니라, 철저한 계산과 가치투자, 그리고 사람에 대한 신뢰에서 나옵니다.
'무신사가 키우고 권오일이 가져간다'는 말은 비판이 아니라, 그의 뛰어난 안목과 타이밍을 인정하는 표현입니다.
2026년, 그가 만들어갈 다음 장이 궁금해집니다.
과연 대명화학은 한국의 LVMH가 될 수 있을까요?
K패션은 정말 K푸드, K뷰티처럼 세계를 장악할 수 있을까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권오일이라는 이름이 패션업계에서 점점 더 큰 울림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얼굴은 모르지만, 그의 영향력은 누구나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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